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오가이 (문단 편집) == 생애 == 대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를 맡아온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최하급 무사였다. 모리의 집안은 그다지 명망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쳐내고자, 모리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켜 모리만큼은 자신과 달리 출세하기를 원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및 할머니의 뜻대로 상당한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부방에 들어가서 사서 오경과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연날리기나 팽이치기 같은 놀이를 할 시간도 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다 쉴 때는 집 앞의 정원을 거닐거나 [[사군자]]를 쳤다. 1872년 [[도쿄]]로 상경하여 의학 서적을 읽기 위하여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관직에 있었던 친족 니시 아마네(西周)[* 사상가, 교육자, 관료로, 모리와 마찬가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 집안 출신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서양의 지식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에 기여했다. mechanical art를 [[기술]]이라고 번역하기를 최초로 제안한 인물이다.]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하여 1873년 현 도쿄 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도쿄 의학교에 진학하였다. 나이를 2살 올려 나이를 속여 입학했는데, 이때 모리는 겨우 11세 된 어린아이였다. 동급생들이 적어도 10대 후반은 되는 형누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와 그 나이에 맞는 왜소한 체격으로 눈에 띄는 편이었다. "꼬맹이(일어로는 ちび. 얕잡아보는 표현이다)"라는 별명이 붙기도 할 정도. 돌아다니는 이야기로는, 남자 선배에게 [[비역]]의 대상이 되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모리는 도쿄 의학교 주변의 하숙집에서 통학했다고 하는데, 그 일을 당한 것은 기숙사에서의 일이라고 하므로 이야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모리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당한 것인지, "기숙사에서 생활하지는 않았으나 기숙사에 강제로 끌려가" 당한 것인지의 여지는 있으므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9세의 나이로 도쿄 의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는 2020년대에도 깨어지지 않는 최연소 졸업 기록이라고 한다. 졸업 성적은 학부 8등이었다. 1879년에 아버지가 미나미아다치군 소속 의사가 되어 그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센주로 거처를 옮겨, 이후 킷세이도(橘井堂) 의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모리는 도쿄 의학교에 재학하며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1881년에 졸업한 후에는 하숙집에서 나와 센주에 살게 되고 이때부터 의사로서 아버지와 함께 의료 활동에 종사한다. 이 무렵의 경험은 소설 〈임상 기록(カズイスチカ)〉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모리 오가이는 [[일본 육군]] [[군의관]]이 되었고, 1884년 [[독일]]의 의학과 위생 제도를 배워오기 위해 [[독일 제국|독일]] [[유학]]을 명 받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의학 이외에도 [[문학]]과 [[미술]]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겪은 체험이 그가 소설가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모리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 이전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문학과에 지원하고 싶어 할 정도로 의사보다는 문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 가업을 잇는 차원에서 제2지망인 의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 이때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괴테의 "체념(resignation) 철학"을 모리는 일평생 지침으로 삼았는데, "주체와 대상간의 억압적인 분리를 극복하는", 그리고 "단념하는 것이 괴롭고 불만스러울지라도 그에 맞서는 태도로서의 태연함을 견지하는" 괴테식 체념을, 모리 본인의 삶에서 맞닥뜨린 여러 고뇌와 굴욕에 대응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필한 소설의 주제로도 곧잘 다루었다.[* 이러한 "괴테식 체념"은 동양에서 통용되는 체념과는 다른 개념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 개인이, 동양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저 "난 여기까지구나" 하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만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으로 삭히지만, 괴테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래, 현실은 이렇고 난 여기까지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하고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모리가 지은 소설 〈기러기(雁)〉의 여주인공 오타마의 대사 중 "저, 이제부터 씩씩해질 거예요."가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러한 괴테식 체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를 일역하여 출판하였고,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 5가지를 본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한편, 그의 대표작 [[무희#모리 오가이의 소설]](舞姫)도 이곳에서 독일 여자와의 연애 경험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이 그를 쫓아 따라와 모리와 결혼하려다가 모리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엘리제는 1개월 만에 도로 귀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본인이 외국인과 연애 및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사회적 풍조가 있었고, 이에 더하여 모리의 집안 사람들은 모리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모리의 입신양명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우려하였기에 반대가 심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모리가 이 연애 경험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무희〉가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격을 불러올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의 일본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겠는가.] 이러한 독일 유학 경험 덕분에 독일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독일어로 이루어진 연설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유학 이후에도 독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어서, 독일에서 출간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간 서적이 모리의 책장에 꽂혀 있곤 하였다고 한다. 세계화 시대에 앞서 서양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위한 교량을 놓아준 문인들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본명인 '린타로'를 독일 사람들이 발음하기 매우 힘들어했기에 독일 유학 시절에는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점이 훗날 자식들에게 오토, 마리, 후리쓰, 안느 등의 서양식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을 붙여 주게 된 것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888년 귀국한 후 군의 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다. 이때는 주로 유럽 문학 번역과 평론 등에 치중했다. 1889년 번역 시집 오모카게(於母影)를 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0년 '[[무희]](舞姫)'를 시작으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다. 청일전쟁 도중 1개월 동안 [[조선]] 부산에 체재하였는데, 그때 쓴 일기도 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 부임했다가 1896년 일본에 귀국했다. 이후 1899년 6월에는 [[소장(계급)|소장]] 계급에 상당하는 군의감이 되었고, 이때 현재의 [[기타큐슈]]시에 속한 고쿠라(小倉) 주둔 [[육군]] 제 12[[사단(군대)|사단]] 군의부장으로 좌천된다. 창작 활동 및 번역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본업인 군 생활에 소홀하다는 의혹의 시선을 받은 것. 그리고 이는 "모리가 군의관의 품위에 맞지 않는 작품 활동을 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시구로 타다노리(石黒忠則)등의 책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리는 고쿠라로 좌천되었다. 이는 다시 도쿄로 돌아와 승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모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일본 육군 원수로서 육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히 일본 육군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며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까지 맡아 정계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막후 실세였다.]에게 재능을 인정받는데, 그 이전까지는 고쿠라 좌천 이후의 승진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모리는 후쿠오카 니치니치신문(福岡日日新聞)에 〈오가이는 누구인가(鷗外漁史[* 漁史(ぎょし, 교시)는 문인 등이 자신의 필명 뒤에 붙이는 일종의 호칭격 접미사다.]とは誰ぞ)〉라는 소논문을 투고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도쿄의 여러 신문, 여러 잡지 등에서 오가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화살이 꽂혀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가이라는 이름은 이곳[* 고쿠라]에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가이는 여기에서 죽었다."다.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 츠와노 번에서 도쿄로 상경한 이래로 독일 유학, 복무를 위한 이동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도쿄를 떠나 일하며 지낸 적이 없었던 모리에게 고쿠라 좌천은 큰 충격과 깊은 좌절을 안겨 준 것이었다. 1902년 3월 제 1사단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아 [[도쿄]]로 되돌아온 뒤 1904년에서 1906년까지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07년에는 [[중장]]에 상당하는 육군 군의총감에 올라 군의관의 최고봉인 육군성 의무 국장이 된다. 또 같은 해에는 제 1회 문부성 미술 전람회의 서양화 부문 심사 위원 주임을 맡기도 했다. 1916년 육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는 현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제실[[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제국 미술원장 등을 역임하다 [[1922년]] 폐 [[결핵]]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